아무래도 미국에 살다 보니 한국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곤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책을 많이 읽으세요...'라고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곤 하죠. 당당하게 '책이 답이다!'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맞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 땅은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던 친구가 저를 만나러 놀러왔는데 어디 혼자 내놔도 될 정도로 영어를 하더라고요. 워낙 미드를 좋아하는 친구여서 말 그대로 '스피킹'이 되는 친구였는데 하필이면 범죄 수사물만 좋아하는 바람에 '교살', '사인', '사후 경직'같은 단어에 최적화되었더군요 ㅎㅎ 그래도 이 친구처럼 미드나 영화를 보며 배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원서 독서를 통해 영어공부를 했던 방법을 나눠보려고 해요.
이게 모든이에게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답이 될 수도 있으니 짧게나마 나눠볼게요.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케이스입니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 엄마 밑에서 이 세상에서 첫 숨을 터트리자마자 원 없이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갑자기 한국인도 별로 없던 미국 땅에 떨어지니 독서에 굶주리게 되었죠. 물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만화책을 훨씬 많이 읽었고 장래희망이 만화가였을 정도였지만 미국에 오니 만화가 다 뭡니까, 그냥 뭐든 너무 읽고 싶었습니다.
영어를 못하니 외국 친구도 없고, 아무리 한국어를 한다고 해도 몇 안 되는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슈퍼 내향인인 제가 갑자기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를 사귈 리도 없었죠. 그러던 중 학교에서 가까운 시립 도서관을 찾아갔고 그날부터 매일 하굣길에 도서관에 들려서 숙제도 하고 책도 읽었습니다.
물론 영어로 된 책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책이 가득한 곳에 있으니 정말 행복했습니다. 언젠가는 그 책을 다 읽어봐야지, 하는 야심찬 꿈도 꾸고, 한적한 도서관에서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제 수준에 맞는 어린이 동화책 부터 시작해서 챕터북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챕터북이란 주로 50~80 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책으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기 좋은 책들입니다.
제가 참 재밌게 읽었던 책은 <Amelia Bedelia> 시리즈로 아멜리아 베델리아라는 메이드가 하나 이상의 뜻을 가진 단어를 늘 잘못 이해해서 사고를 치는 내용인데 이걸로 단어를 많이 배우고 내용도 재밌어서 전부 읽었어요.
커튼을 치라는 뜻으로 "Draw the curtain"이라고 시키면 앉아서 커튼을 그림으로 그리곤 하죠.
동화책 판형부터 챕터북까지 다양한데 최근에는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됐더군요. 원래 메이드였는데 시대에 맞지 않아서 그런지 보통 어린이로 바뀌었어요. 저는 오리지널 일러스트도 좋아해서 오리지널 아멜리아를 더 좋아합니다.
동화책과 챕터북의 장점
1. 쉽다
2. 짧다!
2번이 훨씬 큰 장점입니다.
한 권을 끝냈다는 성취감을 갖게하고 그 성취감은 또 다른 책에 손을 뻗게 되는 동기를 부여해주니까요.
아무리 영어 수준은 어린이라지만 그래도 중학생인데 언제까지나 아멜리아 베델리아만 읽을 수는 없고, 슬슬 조금씩 두꺼운 책으로 넘어갑니다. 어떻게든 낯익은 책을 찾아 헤매던 중 <오즈의 마법사>를 발견하죠. 어릴 때 읽었고 티브이 만화로도 봤던 오즈의 마법사! 그런데 피터팬이나 어린왕자 같은 많은 동화 중에서 오즈의 마법사를 골랐던 이유는 바로 그 책이 한 권으로 끝나는 게 아닌, 대 장편 시리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가 몇 권짜리인지 아시나요?
무려 14권입니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한국에도 14권 다 번역되어 출간됐는데 제가 어렸을 때는... 있었는지 몰라도 하여튼 그때의 저에게는 정말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죠.
잘 아는 내용의 시리즈를 읽자
거기서 눈이 돌아가버린 저는 그날부터 매일 도서관에서 오즈의 마법사를 읽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1권인 <오즈의 마법사>의 내용은 잘 아니까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던지, 지명을 쉽게 익히고 제대로 이해를 못 해도 그냥 읽었습니다. 영어 실력이 늘어서 읽은 건지, 아니면 그냥 아는 내용을 때려 맞추면서 읽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후자겠죠. 친숙한 내용의 <빨강머리 앤>이나 <작은 아씨들>, <메리 포핀스>도 전부 시리즈물입니다. 이미 아는 책의 후편을 읽는 것은 처음 접하는 내용을 생소한 언어로 읽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게다가 이미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이니 더 재밌게 다가올 확률도 높아지죠.
하지만 1권을 달달 외울 때까지 다시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책 욕심이 많은 데다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기에는 아직 안 읽은 책이 너무 많으니까. 게다가 <오즈의 마법사>는 14권 짜리니까! 그래서 다음 권인 <환상의 나라 오즈>를 읽습니다. 2권에서 도로시는 다시 오즈로 돌아가더군요. 잘 알려져 있는 일화가 아닌 새로운 도로시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만' 찾아본다 - 나만의 단어장 만들기
여기서 포인트는 그냥 훌훌 읽는 것입니다. 문장이나 문단 자체를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읽습니다. 물론 알파벳도 모를 정도면 통하지 않겠지만 한국 중학생 정도의 영어 수준으로 'I went back to OZ' 정도를 이해한다면 그냥 읽습니다. 읽다가 여러번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있으면 참다못해 사전을 찾아보는 정도였어요. 이렇게 답답할 정도로 궁금할 때 단어를 찾아보면 그 단어를 기억하게 됩니다. 저자가 자주 쓰는 단어라면 후에도 계속 나올 테고 한 번 찾아봤다가 잊어버렸더라도 '아, 이게 무슨 뜻이었더라?'하고 다시 찾아보며 결국은 익히게 되는 거죠. 게다가 계속 찾아보기 귀찮으니까 옆에 적어놓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단어장을 만들게 되는 거죠.
어차피 모르는 단어가 수두룩빽빽인데 그걸 다 찾아보면 진도가 나가지 않고 그러면 사전만 뒤적이다 질려서 못 읽게 됩니다.
시리즈의 첫 권을 잘 골라서 읽을 책을 확보한다
저는 영어를 배우는 사람에게도, 책에 큰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도 시리즈를 추천합니다. 왜냐면 1권이 재밌으면 그 다음 몇 권을 읽는 건 보장된 일이니까요. 지금도 도서관에서 괜찮은 시리즈의 1권만 쭉 대여해서 집에 둡니다. 그러면 주로 야심한 시각에 상기된 얼굴을 한 아이가 저희 방으로 뛰어 들어옵니다. 재밌게 읽은 책의 다음 권을 대여해달라는 거죠. 그러면 그 시리즈와 작가의 다른 책이나 시리즈를 연이어 읽게 됩니다. 만화책을 예로 들었을 때 '원피스'라는 만화에 빠지면 다음 책을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80권도 넘으니까요. 한동안은 '뭘 읽지'하는 고민 없이 거기에 푹 빠져서 살게 되죠. 드라마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중간에 재미가 없어질 수도 있죠. 그러면 가차 없이 다른 시리즈를 시작해보세요. 재미없는 책을 붙들고 있기에는 재미있는 책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4개월 정도에 걸쳐서 14권을 다 읽었고, 14권을 읽을 때는 확실히 더 쉽게 읽었습니다. 14권을 읽을 때는 원어민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절대 아니고요...
피아노나 다른 악기를 배워보신 분이라면 아실 거예요. 처음에는 그렇게 어려웠던 곡이 몇 개월 꾸준히 레슨을 받고 다른 곡들을 치고 돌아와서 다시 쳐보면 얼마나 쉬운지.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꾸준히 다 읽고 앞 번호의 책으로 다시 돌아가서 읽어보면 그때는 부족한 수준으로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14권의 책을 읽으며 만들어진 단어장도 있지 않습니까? 누가 골라준 단어가 아닌, 궁금함에 몸부림치다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찾아본 단어로만 이루어진 진짜배기 단어 모음이죠.
다 읽으면 다음 시리즈로 넘어간다
이렇게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끝내고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비록 반도 이해 못 했을지라도 이미 결과를 다 알고나면 흥미가 떨어지고, 흥미가 없는 독서는 억지로 하는 독서가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를 읽으면 또 다른 단어들에 노출되니까 저는 다음 시리즈로 넘어갑니다, 바로 <초원의 집> 시리즈죠!
사실 책의 수준으로 보자면 <오즈의 마법사>보다 <초원의 집>이 훨씬 쉽고 짧습니다. 게다가 판타지 장르인 <오즈의 마법사>보다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초원의 집>을 이해하기가 훨씬 쉽겠죠. 그래서인지 <초원의 집>은 더 쉽게 즐기며 읽었습니다. 북미 원주민에 대한 편협한 묘사로 어린이에게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던 적도 있지만 현재도 잘 팔리고 있는 걸 보면 개정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초원의 집>은 본격 '먹는 책'입니다. 인기 먹방 프로인 <맛있는 녀석들>을 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냥하고 채집해서 먹는 건데도 묘사가 너무 좋아서 푹 빠져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와 <초원의 집>을 완독한 후에는 드디어 <해리 포터>가 나왔습니다!
다음 권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이때부터는 반복 독서를 시작했던 것 같네요.
요즘은 재밌는 시리즈가 더 많더군요. 다음 기회에 장르별로 재밌고 영어 초보에게 적합한 시리즈를 여러 개 추천해볼게요.
아, 원서를 구하기도 힘든데 정독을 하지 않는 건 너무 아깝다,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저도 환경이 달랐다면 그렇게 읽기 힘들었을 거 같아요. 그래서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원서 사이트와 또 거기서 몇 권을 추려서 다음 포스팅에서 소개할게요. 다행히 <오즈의 마법사>도 포함입니다!
또 글이 엄청나게 길어졌네요...
책 얘기만 하다보면 이렇게 말이 많아져서 큰일입니다.
짧고 간략하게 말하고 싶은데. 앞으로 더 많이 써보고 더 많이 퇴고해봐야겠습니다.
제 경험담으로 영어 원서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줄어들었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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